가정-반성 by spmint


지금 든 반성의 마음을 잊지 않고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전에 써본다.

짧은 머리에 캐주얼한 옷차림을 한 여자는 레즈비언 일 것이고 외모에 무척 신경을 쓰고 여성스런 말투를 하는 남자는 게이일 거라는 추정을 아주 당연한 상식처럼 이야기하는,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모든 성소수자들의 대변자라도 된냥 알고 있는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고 말았다.

나는 언제 처음 스스로가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인지했는지를 물으며 자신은 아주 최근까지도 스스로가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본적이 없었다는 남자에게 그게 바로 당신이 다수고 힘을 가졌다는 증거라며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결국 다수와 소수를 가르는 차별의 논리는 상대적인 것이라 그 역시 범주를 넓히면 유색인종이라는 소수자일 따름이다.

성적인 주제를 논하는 것 자체에서 죄의식을 느끼는 스무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었겠지만, 돌아보면 그 때의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게도 성은 즐거운 것이기 보단 불편하고 부끄럽고 심지어 죄악시되는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도 성소수자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여건에 처하게 되었고, 좀 더 성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만일 내가 가진 성적 지향이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소리높여 그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다수라는 안도감이 용기가 되고, 소수를 대변하는데서 오는 정의감이라는 상을 스스로에게 안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 떠들어댈 수 있었던 거다.

언제나 스스로 느끼는 옳다는 확신은 위험하다.



애덤 모턴, 변진경 역, 잔혹함에 대하여-악에 대한 성찰, 돌베개, 2015. by spmint


돌베개에서 나오기 시작한 "철학자의 돌"이라는 철학 교양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물은 루틀리지(routledge) 출판사의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번역본인 모양이다.

(루틀리지 출판사의 해당 시리즈 목록은 https://www.routledge.com/Thinking-in-Action/book-series/SE0001로)

루틀리지 출판사 본을 열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출판사 웹사이트에서 게시하고 있는 표지 디자인으로 보아선 돌베개에서 출간한 연작의 외형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루틀리지 출판사본 시리즈의 표지 디자인은 주제와 관련된 비교적 단순하고 감각적인 사진 이미지를 전면에 크게 배치해 책의 이미지에 대해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디자인 했다.

반대로 돌베개의 디자인은 그와는 상반되게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전략을 택했다.

앞면 표지에는 중앙으로 정렬된 제목, 저자, 목차 전체가 장식 없이 배치되었다.

표지의 글자들은 모두 금속성을 띤 붉은 색으로 찍혀있지만 책의 주제인 "악"이라는 글자만은 색이 채워지지 않고 눌림으로만 표시되었다.

표지종이는 촉각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코팅이 없는 종이를 선택한 것 같기도 하지만 쉽게 낡고 보푸라기가 생기는 골이 있는 종이는 보관이나 소장에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원래 출판사의 디자인 보다 주제 자체에 대한 강조가 적은 점은 아쉽다.

책은 250페이지 내외로 그리 두껍지 않고, 철학적인 주제임에도 대중문화나 근래의 사건을 예로 많이 들고 있어 진입장벽이 낮은 점이 장점이다. 사실 이런 장점은 루틀리지 출판사 본이 더 잘 살려주는 듯 하다.

이런 포인트를 드러내준다고 볼만한 부분은 저자가 책 내용 중간에 괄호를 친 문단을 만들어 동료 학자들에게 조언하는 부분이다.

인용하면:

(동료 철학자들에게 알림. 여러분은 명석함과 예리함을 마음먹은 만큼 보여줄 수 있다 해도 유용한 이미지와 단순한 이야기 구조, 매력적인 표지를 제공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많은 다른 문제들에서처럼 부정확한 개념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책은 분명히 존재하는 '악'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고 어떻게 대면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일지에 대한 고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해라는 과정 자체에 상황 혹은 개념에 대한 자기 이입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그 행위에 이입시켜봐야 한다. 그런데 이 이입행위 자체를 부덕이라 여기기 때문에 애초에 구체적으로 나쁜 행위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리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도식은 나쁜 행동이나 악행이 자행되는 매커니즘과 공명하는 모순을 가진다.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이입불가능성이 나쁜 행동/악행의 기재가 되기 때문이다. 대상이 나와는 전혀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은 금기를 범할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악인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존재이므로 보통사람에게 적용되는 인권으로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도 여기서 나오게 된다.

저자는 끊임없이 악인과 보통사람에겐 차이가 없으며 악행을 불러오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의 부재'라 주장한다. 참으로 옳다.

저자는 단순히 나쁜 행동 혹은 폭력과 악한 행위를 구분하려 시도한다. 모든 악행이 폭력성을 동반하진 않으며, 이 구분에서 중요한 점은 결과보다도 의도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는 영화/소설 시계태엽오렌지의 내용이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저자는 적절한 분노표출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없는 상태는 오히려 폭력을 야기한다는 식으로 영화의 내용을 해석했던 것 같다.

폭력성의 '소거' 자체가 악을 소멸할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완전히 다른 얘기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캐주얼한 토론 중 신실한 기독교인인 성소수자가 자발적으로 호르몬제를 투여해 '잘못된' 성적 지향을 '치료'한 사례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마 동성을 좋아하지 않고 이성을 좋아하게 만드는 호르몬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아마 성적 반응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 다시말해 화학적 거세와 비슷한 유형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동성애자에서 무성애자인 그/그녀는 결국은 다시 더 소수인 성소수자로 지위를 바꾸게 된 것이고 궁극적으로도 기독교 윤리에 썩 걸맞은 상태에 미치지는 못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시계태엽오렌지 속 주인공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길지 않은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악'이라는 개념이 가진 여러 면들을 쪼개어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렇게 정의한 '악'과의 '화해'를 요청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이상적인 '악'과의 '화해'의 예로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사례를 소개한다.

아직도 수많은 화해들이 미뤄지고만 있고 매일 갈곳잃은 분노들이 달려들 새로운 악이 뉴스 속에 생산되는 때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영롱, 사표의 이유, 서해문집, 2015. by spmint


사회학 연구자인 저자의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이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연구 대상 집단으로 삼은 특정 직군, 특정 연령대에 해당하는 인물들과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다.

책 표지와 내지 편집은 무난한 편이다. 뒤집어진 넥타이로 만든 획에 시계판을 삽입한 타이포그라피로 제목을 적은 것은 인상적이다.

넥타이는 책에서 대상 집단으로 정한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의 상징이며, 접혀 꿰메어진 부분이 보이는 넥타이는 그 체제를 전복한 삶의 여정을 택한 해당 집단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부제인 "'나'는 없고 노동만 있던 나날, 나는 회사를 떠났다'는 내용 옆에는 각 꼭지 첫 부분에도 들어가는 의자에 앉은 인터뷰이의 모습이 배치되었다. 이 역시 인터뷰 내용을 골자로 하는 책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의자에 앉은 인터뷰이 옆, "미치도록 취직되어야 하는 이 시대"라는 추천사의 문구가 인상적이다.

왜 우리는 미치도록 취직되기를 원하는가. 나 역시 이 질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하자 마자 갑자기 미치도록 취직되기를 원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민해 진로를 바꾸는 마당에도 그저 미치도록 취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 뭘 위해 뭐가 되어야 할지는 미처 질문으로 떠올리지도 못했다.

이 책은 그런 직업인이 되려는 누구나 꼭 한 번은 해 봐야 할, 왜 미치도록 취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하는 길을 더듬는 데에 매우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은 아주 자연스레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각자가 처해있는 사회, 경제, 문화적 상황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상황은 같다. 모두 하나의 혹은 매우 좁은 이상적인 길을 설정하고 그 길 밖을 그릇된 길이자 패배의 길이라 배워왔다.

그 배움의 과정에서 개인은 없다. 오로지 그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소수를 걸러내기 위한 분절적인 평가 지표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소수가 약속받는 보상은 더 많은 선택의 권리와 기회라고 그렇게 기만된다.

사실상 지표상 유능한 소수 역시 선택권은 없다. 그 지표가 가리키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 외엔 없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의 일터는 오로지 미생 '만'을 위해 마련된 자리"라 표현했다.

직장이 완생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그저 노동자가 "영원히 미생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자리이다.

유능한 소수가 제공받는 선택의 권리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아니다. 더 비싼 것을 더 많이 소비할 권리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추기를 요구받는 기능을 '소비자로서의 기능'으로 표현한다.

장시간 노동이 필연적인 고소득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만든 돈을 소비할 시간마저 부족하다. 때문에 더 집약적인 소비로서 스스로를 보상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로서 자발적인 과소비를 할 능력을 갖춘 완벽한 소비사회의 구성원이 완성된다.

능력의 유무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소득과 노동 시간을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없다.

적게 벌고 더 합리적인 노동 시간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

책 속 인터뷰에는 인문학 공동체 공부 모임에서 봉건사회의 농노가 하루 노동하는 시간이 4시간 미만이라는 점에 충격 받은 인터뷰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나 역시 몰랐던 사실이고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나는 현재 하루 4시간 노동에 4시간을 통근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무슨... ㅂ...

책의 초반 부에는 박카스 광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박카스 광고가 오랫 동안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이라는 분위기를 만들고 주된 메시지로 "그러니까 열심히 일(공부)합시다!"라는 결론을 도출해왔다고 지적한다.

재미있는 점은 최근 티비에서 보이는 박카스 광고의 방점이 약간 바뀌었다는 거다.

웬 평범한 대학생이 좋아하는 여자의 취향에 맞추려고 이렇게 저렇게 외모를 바꾸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서사를 광고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레드불, 핫식스 열풍도 한 풀 꺾인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얼 위해 허우적대고 있는지 돌아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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