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에서 나오기 시작한 "철학자의 돌"이라는 철학 교양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물은 루틀리지(routledge) 출판사의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번역본인 모양이다.
(루틀리지 출판사의 해당 시리즈 목록은 https://www.routledge.com/Thinking-in-Action/book-series/SE0001로)
루틀리지 출판사 본을 열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출판사 웹사이트에서 게시하고 있는 표지 디자인으로 보아선 돌베개에서 출간한 연작의 외형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루틀리지 출판사본 시리즈의 표지 디자인은 주제와 관련된 비교적 단순하고 감각적인 사진 이미지를 전면에 크게 배치해 책의 이미지에 대해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디자인 했다.
반대로 돌베개의 디자인은 그와는 상반되게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전략을 택했다.
앞면 표지에는 중앙으로 정렬된 제목, 저자, 목차 전체가 장식 없이 배치되었다.
표지의 글자들은 모두 금속성을 띤 붉은 색으로 찍혀있지만 책의 주제인 "악"이라는 글자만은 색이 채워지지 않고 눌림으로만 표시되었다.
표지종이는 촉각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코팅이 없는 종이를 선택한 것 같기도 하지만 쉽게 낡고 보푸라기가 생기는 골이 있는 종이는 보관이나 소장에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원래 출판사의 디자인 보다 주제 자체에 대한 강조가 적은 점은 아쉽다.
책은 250페이지 내외로 그리 두껍지 않고, 철학적인 주제임에도 대중문화나 근래의 사건을 예로 많이 들고 있어 진입장벽이 낮은 점이 장점이다. 사실 이런 장점은 루틀리지 출판사 본이 더 잘 살려주는 듯 하다.
이런 포인트를 드러내준다고 볼만한 부분은 저자가 책 내용 중간에 괄호를 친 문단을 만들어 동료 학자들에게 조언하는 부분이다.
인용하면:
(동료 철학자들에게 알림. 여러분은 명석함과 예리함을 마음먹은 만큼 보여줄 수 있다 해도 유용한 이미지와 단순한 이야기 구조, 매력적인 표지를 제공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많은 다른 문제들에서처럼 부정확한 개념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책은 분명히 존재하는 '악'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고 어떻게 대면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일지에 대한 고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해라는 과정 자체에 상황 혹은 개념에 대한 자기 이입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그 행위에 이입시켜봐야 한다. 그런데 이 이입행위 자체를 부덕이라 여기기 때문에 애초에 구체적으로 나쁜 행위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리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도식은 나쁜 행동이나 악행이 자행되는 매커니즘과 공명하는 모순을 가진다.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이입불가능성이 나쁜 행동/악행의 기재가 되기 때문이다. 대상이 나와는 전혀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은 금기를 범할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악인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존재이므로 보통사람에게 적용되는 인권으로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도 여기서 나오게 된다.
저자는 끊임없이 악인과 보통사람에겐 차이가 없으며 악행을 불러오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의 부재'라 주장한다. 참으로 옳다.
저자는 단순히 나쁜 행동 혹은 폭력과 악한 행위를 구분하려 시도한다. 모든 악행이 폭력성을 동반하진 않으며, 이 구분에서 중요한 점은 결과보다도 의도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는 영화/소설 시계태엽오렌지의 내용이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저자는 적절한 분노표출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없는 상태는 오히려 폭력을 야기한다는 식으로 영화의 내용을 해석했던 것 같다.
폭력성의 '소거' 자체가 악을 소멸할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완전히 다른 얘기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캐주얼한 토론 중 신실한 기독교인인 성소수자가 자발적으로 호르몬제를 투여해 '잘못된' 성적 지향을 '치료'한 사례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마 동성을 좋아하지 않고 이성을 좋아하게 만드는 호르몬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아마 성적 반응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 다시말해 화학적 거세와 비슷한 유형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동성애자에서 무성애자인 그/그녀는 결국은 다시 더 소수인 성소수자로 지위를 바꾸게 된 것이고 궁극적으로도 기독교 윤리에 썩 걸맞은 상태에 미치지는 못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시계태엽오렌지 속 주인공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길지 않은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악'이라는 개념이 가진 여러 면들을 쪼개어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렇게 정의한 '악'과의 '화해'를 요청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이상적인 '악'과의 '화해'의 예로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사례를 소개한다.
아직도 수많은 화해들이 미뤄지고만 있고 매일 갈곳잃은 분노들이 달려들 새로운 악이 뉴스 속에 생산되는 때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