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다른 어떤 해보다도 다채로운 색깔들로 물들여진 해였다. 6월 미 연방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면서 전 세계의 SNS사용자들이 프로필사진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을 덧입혔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런 움직임은 파리테러에 대한 반응에서도 반복되었다. 일부 사용자들은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과 평화의 상징인 피스마크를 합쳐 만든 표식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용자들이 자신의 기존 프로필 사진에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흰 색, 빨간색을 덧입혔다. 색채가 감각적이고 효과적인 의견의 표출 도구로서 개인 차원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색채전문기업팬톤(PANTONE®) 역시 이런 기류를 감지했다. 팬톤색채연구소는 “점차 더 많은 소비자들이 색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는 데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진단은 매년 12월 팬톤이 발표하는 올해의 색 선정에도 영향을 미친듯 하다.

12월 3일 팬톤은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옅은 분홍색인 로즈 쿼츠(Rose Quartz)와 옅은 하늘색인 세레니티(Senenity)를 2016년의 색으로 선정했음을 알렸다. 지난 16년동안 이어진 올해의 색 선정 에 하나 이상의 색깔이 선정되었던 이력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자못 파격적인 결정이다. 이 결정의 파격은 단지 선정된 색의 수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팬톤 색채연구소장 리트리스 아이스먼(Leatrice Eiseman)의 “다른 모든 디자인 영역에서의 유행 색조를 선도하는 패션계에서 그랬듯 우리는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 성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발언의 강력한 사회, 정치적 메시지 역시 통상적인 기업의 선전전략으로는 파격적이었다.
팬톤의 파격적 올해에 색 선정에 대해 외신들은 한 목소리로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나 놀라움에 뒤따르는 반응에서는 명암이 갈렸다. 산 호세 머큐리 뉴스(San Jose Mercury News) 19일자 기사에서 안젤라 힐(Angela Hill)은 팬톤의 선전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저 베이비 핑크와 베이비 블루일뿐인 두 색깔을 고른 마케팅 전략에 사회적 책임과 성 역할의 평등이라는 깊은 의미가 숨어있는 듯 윤색하고 있다”며 부정적인 논조를 보였다. 그는 이어서 미국의 유력 페인트 회사 벤자민 무어(Benjamin Moore)역시 가장 중립적이고 솔직한 색이라는 가치평가를 달고 “심플리 화이트(Simply White)”를 올해의 색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에 대해서도 덧붙여 비난했다.
12월 3일자 와이어드 인터넷판(wired.com)에서는 분홍색과 하늘색에 부여된 성적 함의가 이미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뒤집혀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기사의 필자인 리즈 스틴슨 (Liz Stinson)은 캐비닛(Cabinet)에 기고된 데이빗 번(David Byrne)의 글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인용된 내용은 1918년 발행된 레이디스 홈 저널(The Ladies’ Home Journal)을 근거로 분홍색이 짙은 빨강만큼이나 위협적인 이라는 이유로 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남자아이들을 위한 색이었고, 파란색은 그 반대의 이유로 여자아이들을 위한 색이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현대적 이해와는 달리 18세기 이전에는 서구에서는 특정 색조나 색채에 성적 대비가 대입되기 보다는 색채 자체를 여성적인 것이자 부정적인것,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색채체계 속에서 젠더의 대비가 당연시 된 것은 18세기 이후였다. 1809년 낭만주의 화가이자 색채이론가였던 필립 오토 룽에(Philipp Otto Runge)는 노랑, 주황이 포함된 난색 계열이 남성을, 파랑과 보라의 한색 계열이 여성을 대표하는 색채로 분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자 문화권에서 “색(色)”이라는 문자 역시 서구에서 통용되던 18세기 이전의 색에 대한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적색이 남성적인 색, 혹은 활기를 상징하는 색으로, 청색이나 흑색을 차갑고 음(陰)에 가까운 색으로 생각했던 것도 유사하다. 중요한 건 역사적으로 서로 대조관계에 있는 색을 각각 남성과 여성에 대입시켜 왔지만, 고정적인 남성색, 여성색이라는 개념은 매우 근래에 생겨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점이다.
스틴슨은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색깔을 뒤바꾼 상품을 만드는 일이 무의미하진 않지만 이렇게 짧은 역사를 가진 편견을 부정하기 위해 두 색깔을 함께 선정함으로써 결국 기존의 색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할 혐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신 좀 더 중립적인 색깔을 가지고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더 효과적으로 평등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통감하는 기업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라 제안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로즈쿼츠와 세레니티가 ‘현실정치’에서도 활약할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표했다. 그는 “대선토론에서 빨강과 파랑이 아닌 파스텔 색조의 타이를 맨 후보들을 볼 수 있을지”에 대 한 의문을 남기며 기사를 마친다. 그렇다. 이 두 색조는 전통적으로 성적 함의에서의 정치적 메시지 이외에도 공화당과 민주당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빨강과 파랑은 각각 진보당과 보수당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예외다. 작년 초 한나라당이 혁신의 일환으로 당명을 새누리로 바꾸면서 보수당이 그토록 치를 떨던 빨간색으로 당의 상징 색을 바꾼 덕이다. 여기에 맞추어 당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전 대표는 당의 상징색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 이런 ‘색깔 정치’에 대해 지난 해 1월 20일자 오마이뉴스에서는 “본질적인 변화 없는 이미지 교체의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언을 기업 선전에 혹은 제품 선전에 활용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이유도 없다. 메시지의 파급력이 큰 기업 차원에서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언들을 회자시켜 사람들에게 한 번쯤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 만은 분명하니 말이다. 팬톤은 2016년 올해의 색 선정 이전에도 여러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를 연구한 후마나이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2012년실제 피부색과 가장 근접한 컬러 110가지를 구현한 색상표 “팬톤 스킨톤 가이드(Pantone Skintone Guide)”를 출시한 바 있다.이 제품의 동영상 광고 속에는 흑인, 백인, 남미계, 동양인이 차례로 등장하며 자신들은 흑, 백, 적, 황색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표시된다. 이 제품이 가진 정치적 효용은 아직 증명된 바 없으나 12월 18일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에 참여해 행사에 참석한 나이지리아 출신 유학생에게 “연탄색” 운운했던 김무성 대표에게는 분명 유용한 선물이 되리라.
하지만 모든 색의 선택을 정치적 메시지로 봐서는 곤란하다. 단순히 색에 대한 취향이나 기호는 정치적 평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특정 색깔에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을 충분히 경험했다. 색깔의 변화가 내용의 변화를 반드시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지금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색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거나 얼굴을 찡그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색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장 경쾌한 수단이다.
동아일보 김유영기자는 “소년에게 분홍을 허하라”라는 제목의 12일 18일자 칼럼에 팬톤의 올해의 색 선정의 양성평등성을 치하하는 논평을 남겼다. 그는 팬톤의 결정과의 유사한 사례로 하버드대 인문학부에서의 무성 인칭대명사 사용 결정, 레고의 여성 고고학자, 생물학자, 우주인 피규어 발매 등을 열거했다. 그리고 칼럼의 말미에는 “길을 가다가 분홍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될 것 같다”라는 감상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와이어드 지의 스틴슨은 기사의 말미에 성 평등과 같은 무거운 교훈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 팬톤이 정한이 두 색이 너무 ‘이쁘게’ 잘 어울린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역시 충분히 이 두 색을 구매할 용의가 있음을 고백했다. 옷장 속이 온통 검정, 남색뿐인 나도 올해는 옅은 분홍색 코트와 하늘색 바지를 하나 샀으니 말 다했다. 이 색깔들은 그냥 예쁘다. 그래도 된다. 만일 내가 거리에서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를 돌아본다면, 그건 그가 양성평등주의자 일 것 같아서가 아니다. 그냥 그 남자가 잘생겨서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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